단어와 직관

수학자 허준이는 언어화되지 않은 지식을 직관이라 불렀다. 마이클 폴라니는 오래전에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했다.

두 말은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인간이 아는 것의 전부가 언어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

문명의 역사 한편에는 이 간극을 좁혀온 흐름이 있었다. 문자가 생기고 언어가 정교해지면서, 과거에는 뭉뚱그려 부르던 것들이 점점 더 세밀한 단어로 쪼개졌다. 이름이 없다고 없던 것은 아니다. 숙련된 장인은 이름 모를 재료의 상태를 손끝으로 구분한다. 다만 이름이 붙고 나서야 그것을 남과 나누고, 다루고, 쌓아갈 수 있었다. 이런 분화를 거치며 우리는 더 정교하게 사고하게 되었다.

현대의 AI는 이렇게 쌓인 기록을 재료로 학습한다. 글을 넘어 이미지와 소리까지 다루게 되었지만, 그 재료는 여전히 세계 자체라기보다 세계가 한 번 기록되고 기호화된 결과다. 인류가 아직 구별해내지 못했거나 기록하지 못한 것은 모델에게도 흐릿하게 남는다. 구별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지 않는 한, 그 기록을 딛고 선 모델의 해상도에도 한계가 생길 수 있다.

다만 이 한계를 섣불리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이름 없는 현상이라고 해서 전부 학습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자를 마주한 인간의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심박이 빨라지는 과정은, 월터 캐넌이 투쟁-도피 반응으로 정식화하기 전까지는 지금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측정하고 재현할 수 있었기에, 이름이 붙기 전에도 관찰의 대상이었다.

반면 피카소의 경우는 어떤가. 여기에도 데이터는 있다. 인터뷰도, 편지도, 당대의 기록도 있다. 다만 그 기록은 심박처럼 측정으로 모인다기보다 누군가의 증언과 해석에 크게 기댄다. 왜 하필 그 색이었는가라는 질문은 기록을 아무리 쌓아도 숫자로 닫히지 않고 계속 다시 해석을 요구한다.

이것이 사자의 심박과 피카소의 붓질 사이에 있는 차이다. 데이터의 유무가 아니라 데이터의 성질.

정보가 부족한 것과 의미가 닫히지 않는 것은 다르다. 데이터를 더 주면 앞의 문제는 줄어든다. 뒤의 문제까지 같은 방식으로 줄어드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은 교과서에 적힌 단어만으로 배우지 않는다. 몸으로 겪은 일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직관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흡수하고, 다시 불완전하게나마 말과 그림과 행동으로 내놓는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말로 설명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혹은 설명할 말을 끝내 찾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어떤 그림이나 장면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일 수 있다. 데이터나 파라미터의 부족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자리의 문제.

인간이 아무리 단련해도 아가미 없이 물속에서 숨 쉴 수 없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이견이 없는 사실이다. 반면 컴퓨터가 “2”라는 기호를 체화된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아직 열려 있다. 스테판 하나드가 상징 접지 문제라고 부른 것이 이 질문이다. 기호 체계가 다른 기호만 참조하는 닫힌 고리에 머문다는 진단이 있는 반면, 감각과 운동을 가진 몸이 주어지면 그 고리가 풀릴 수 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두 문제는 성격이 다르다. 하나는 거의 확실한 생물학적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철학적 문제다. 이 글이 붙들고 있는 것은 뒤쪽이다.

물론 반론이 떠오른다.

AI가 그린 그림은 이미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가장 강력한 반론은 이것이다. 예측 처리 이론에서 인간의 뇌 역시 감각 입력을 끊임없이 예측하고 오차를 수정하는 시스템으로 설명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직관과 AI의 예측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할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먼저 짚어둘 질문이 있다. 그럴듯한 기호를 정확히 조작해내는 능력과, 그 기호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은 같은 것인가. 중국어 방 논증이 던진 질문이 이것이고, 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그림도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의 창작 역시 과거의 양식과 기억을 재조합하는 일이니, 새로움만으로는 둘을 가를 수 없다. 갈리는 곳은 의미의 출처다. 피카소의 그림은 특정한 시대와 몸과 관계 속에서, 그가 실제로 살아온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 그려졌다.

그러니 물어야 할 것은 AI가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가 아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유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다.

예측 처리 반론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 뇌가 예측 기계라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측이라는 과정이 같다고 해서 그것을 몸으로 겪는다는 사실까지 같아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AI에게 몸을 주면 되는가. 몸을 가진다는 것은 센서를 가진다는 뜻인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는 뜻인가. 자기 보존의 목표까지 가져야 하는가. 어디까지 갖추어야 인간이 말하는 ’체화된 이해’에 가까워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결국 모든 것이 물리적 과정이라면 인간의 경험 역시 원리상 학습 가능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남는다. 이 질문에도 합의된 답은 없다.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찰이다. AI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아직 가설이다. 앞의 것에서 뒤의 것을 끌어낼 수 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별할 수 없다.

예술을 설명하는 말이 늘 모자란 것은, 경험과 맥락을 모두 단어로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그 맥락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북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맥락 경험의 격차’는 과거 귀족과 평민을 가르던 보이지 않는 선이기도 했다.

이제 질문은 모습을 바꾼다.

인간은 세계를 단어로 잘라 공유해왔다. AI는 그 위에서, 인간이 직접 읽기 어려운 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압축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문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 선이 있었다. 그다음에는 전문용어와 학문의 언어가 선을 그었다.

그 압축된 표현을 읽어낼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또 다른 선이 그어지지는 않을까.

단어는 빌릴 수 있다. 직관은 빌릴 수 없다.